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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3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이재정(李在正), 이원긍(李源兢), 노영경(盧泳敬) 선생 등 한말 인사 18인의 간찰 등이 첩장된 [충신첩(忠信帖)] 共六의 卷六 單帖
경매번호  133-100 시작가  5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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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재정(李在正), 이원긍(李源兢), 노영경(盧泳敬) 선생 등 한말 인사 18인의 간찰 등이 첩장된 [충신첩(忠信帖)] 共六의 卷六 單帖으로 수록 人名은 아래와 같으며 상태 양호하다.
<크기> 23.5×33cm
<참고> 출품물 상세

01) 이재정(李在正),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중(子中). 증조부는 이헌조(李憲祖)이고, 조부는 이정하(李鼎夏)이며, 부친은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된 이원상(李元祥)이다. 1820년(순조 20)에 벼슬에 나아가 6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의연하게 스스로 분수를 지켰고, 한 번도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아부나 청탁을 하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대쪽같은 ‘반촌(泮村)의 이처자(李處子)’라고 칭송하였다. 고성군수(固城郡守)에 부임하여 정사(政事)를 청렴하고 정성스럽게 처리하고, 백성들에게 폐단을 주는 정책을 고치는데 힘썼다. 1873년(고종 10)에 흉년이 들자 가련한 백성들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면서 상사(上司)의 뜻을 거슬렸다. 이에 사직의 글을 올리고 귀향하려 하니, 군민들이 길을 막고 못 가게하고, 또 관찰사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관찰사가 비로소 깨닫고 참회하여 여러 번 사과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大臣)들은 그가 법을 잘 지키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라 하여 순량(循良)으로 추천하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아들 이능섭(李能燮)은 1848년(헌종 14) 무신증광문과(戊申增廣文科)에 병과(丙科) 28등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아전(亞銓)에 이르렀다.

02) 이원긍(李源兢), 184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리(公履), 호는 취당(取堂). 충청북도 괴산 출신. 이두진(李斗鎭)의 아들이며, 국학자 이능화(李能和)의 아버지이다. 진사로서 음성현감·춘천판관을 역임하고, 1891년(고종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이조참의·북청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 내무아문참의가 되고, 갑오개혁 때 신설된 군국기무처의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그뒤 법부협판을 지냈는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독립협회 회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썼다. 1898년 3월 15일 여규형(呂圭亨)·지석영(池錫永)·안기중(安沂中) 등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시종원시종 김영준(金永準)의 무고로 잡혀 투옥당하고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10년 유배형을 받게 되었는데, 독립협회가 인권옹호를 강경히 주장하고 정부의 횡포를 규탄함으로써 6월 29일 석방되었다. 1901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인한 독립협회 지도자에 대한 일련의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3년간의 옥고를 겪은 뒤, 1904년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수감되어 있을 때 미국선교사 방커(Bunker, 房巨)의 교화로 기독교신도가 되고 출옥 후 케일(Cail, 奇一)목사가 주관하던 연동교회에 잠시 다녔다. 뒤에 함태영(咸台永)·조종만(趙鍾萬)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지금의 봉익동에 분동교회를 따로 세웠다. 1907년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계몽과 민족정신 앙양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성약기(京城略記)』가 있다.

03) 노영경(盧泳敬), 1848~?

문과|고종(高宗) 14년 정시(庭試)

04) 윤재희(尹載熙), 1825~1899

자 성규(聖揆), 고종때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우수사와 오위장 벼슬을 지냈다

05) 구연태(具然泰), 1849~?

경문(景文) / 무과|고종(高宗) 19년 증광시(增廣試)

06) 서병승(徐丙升), 1855~?

사홍(士弘) / 진사시|고종(高宗) 22년 식년시(式年試)

07) 정철조(鄭徹朝), ?~?

又以禮曹言啓曰, 大小科陳試人草記許

08) 이종호(李宗鎬), ?~?

09) 신규성(愼奎晟), 1855~?

문과|고종(高宗) 19년 증광시(增廣試)

10) 박희방(朴熙房), ?~?

박희방(朴熙房 : 조선 고종 연간)

박희방은 고종 때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있으면서 인천이 외세의 강요로 개항하게 될 무렵 계양산 경명현(景明峴 : 징맹이고개) 좌우에 중심성(衆心城)을 축조하고 공해루(控海樓)를 지었다. 이 중심성을 지을 때의 기금은 국비인 공금과 주민들로부터 자진 염출된 성금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까닭에 그야말로 민(民)과 관(官)이 혼연일체가 되어 출연한 자주국방의 빛나는 기념비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때 세워졌던 기념비는 일제 36년 동안에 훼손, 도괴(倒壞)되었고, 해방 후 돌보는 이 없을 때 성벽이 외국 군 기지의 초석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는 기둥 초석만 남아 있다.

11) 안정옥(安鼎玉), 1846~1893

공은 시조로부터 24세손이시고 찬성공의 15세손이시다. 자는 경신(景信)이요, 호는 죽하(竹下)이시다. 1846년 병오(丙午) 헌종 13년에 출생하시어 신묘(辛卯)년에 48세로 돌아가시었다. 공은 약관(弱冠)에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선전관 관성장 어영청중군 금군별장 중추부부사 한성좌윤이 되시었고, 외직으로 횡성현감 봉산군수 남양부사 전라우수사 경상좌병사의 가이대부(嘉義大夫)에 이르시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충주 장호원에 피신하실 때, 위험을 감지하고 경기도 지평현상동 공의 자택에 13일간 모셨다가 다시 장호원으로 호종(護從)하신 일이 있으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을 추증받으시고, 시호(諡號) 정민(靖敏)을 받으시었다.

12) 윤석인(尹錫仁), 1838~?

주서(周瑞) / 음관|왕대미상(未詳) 년 무보(武譜)

대한제국의 무신. 고종황제 때의 제주목사. 제주재판소의 판사. 1902년(광무 6) 8월, 이재호(李在護)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동년 11월 8일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당시의 제주군수는 송석진(宋錫珍)이며 정의군수는 채수강(蔡洙康)이고 대정군수는 남만리(南萬里)이다.「왕조실록(王朝實錄)」에 의하면 1902년 6월 28일에 전 제주목사 이재호는 제주목(濟州牧)재판소 판사 겸임을 해임하고, 제주목사 윤석인에게 제주목재판소 판사 겸임을 명하였다. 「고종시대사」에 의하면 1902년 5월 제주군 거주 박재순(朴在順)과 양시중(梁時中)이 서로 다툰 사건이 관판(官辦)에 의해 타결되었다. 동년 8월에 서귀포 거주 일본인 송영철지포(松永哲之浦) 등 11명이 창도기고(槍刀旗鼓)를 가지고 한논골〔대답동(大畓洞)〕에 와서 소란을 피우고 양시중을 구타한 박재순을 구박하여 촉거(促去)한 일이 있었다. 이에 목표 일본영사가 일본경찰을 특파시켜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사실무근이라고 생떼를 부려 흐지부지 종결하자 우리 백성들의 분노가 컸다.

13) 김준현(金俊鉉), 1835~?

영보(英甫) / 진사시|고종(高宗) 31년 식년시(式年試)

14) ○○○(○○), ?~?

15) ○○○(○○), ?~?

16) 심의완(沈宜玩), ?~?

17) 구광서(李宗鎬), ?~?

경국(景國) / 음관|왕대미상(未詳) 년 무보(武譜)

18) 강진영(姜鎭濚), 1844~?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m_101_00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