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4/7. 토. 오후3시) 현장경매 성료! 5월 5일 경매에서 뵙겠습니다!
 
전적류
양장고서
고미술품
근현대미술품
근현대사자료
음악관련자료
기타경매
사랑나눔경매
 
 
HOME > 현장경매 > 제 135 회 > 안동의 유학자 興海人 三餘堂 배행검(裵行儉) 선생의 癸巳(1713)年 간찰


[ 제 135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안동의 유학자 興海人 三餘堂 배행검(裵行儉) 선생의 癸巳(1713)年 간찰
경매번호  135-194 시작가  100,000 원

한옥션경매에서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출품물건에 대한 “예약경매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예약시 예약응찰금액의 20%를 경매 1일전까지 예치하셔야 예약응찰을 하실수 있습니다.

- 입금 계좌 안내 -
[국민은행 962701-01-220478 조현제]
[농협 150103-52-008306 조현제]
[대구은행 028-07-011105-3 조현제]
예약하기



<내용> 안동의 유학자 興海人 三餘堂 배행검(裵行儉) 선생의 癸巳(1713)年 간찰로 퇴변색, 얼룩 약간의 부분 손상이 있으나 본문 상태 온전한 편이다.
<크기> 47×24.5cm
<참고> 배행검(裵行儉), 1673~1752

본관은 興海, 자(字)는 수약(守約) 호(號)는 삼여당(三餘堂)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 휘(諱) 경분(景分)의 19세손이며 도와공(도窩公) 휘(諱) 면(冕)의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자질(資質)과 외모(外貌)가 순수(純粹)하며 아름답고 기상과 도량이 높았다. 또한 공은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다. 1684년(숙종 10) 모친(母親)이 하세(下世)하시니 공(公)의 나이 12세였다. 그러나 슬퍼하여 집상을 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고, 아버님을 봉양(奉養)하는데 유순하게 받들고 명령(命令)에 어긋나지 않았다. 1718년(숙종 44) 부친(父親)이 돌아가시니 모든 예절(禮節)을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에 맞게 치렀다. 3년 동안 집상을 하느라 기력이 쇠하여 사람들이 보약을 권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공은 또한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해서 아우와 거처와 음식(飮食)을 반드시 함께 하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남석기(南碩基) 선생이 기사리(耆仕里)에 와서 생도(生徒)를 교수(敎授)할 때 박천근(朴天根)과 공이 함께 학업을 하여 1년이 채 못되어 그 뜻을 소상히 해석하고 붓을 들면 문장(文章)이 넘쳤다. 이에 남공(南公)이 “이 아이는 재주가 비범(非凡)하고 근실(勤實)하며 게으른 빛이 없으니 가히 동자스승이라 할만하니 내가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그 성취(成就)는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1731년 (영조 7)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왔을 때 각읍에 고유(告諭)하여 각각 훈장(訓長)을 뽑아 서원(書院)과 향교(鄕校)에서 강학(講學)이라 하였다. 구계서원(龜溪書院)에서는 공(公)을 뽑아 훈장(訓長)을 시키니 공이 도훈장(都訓長) 눌은공(訥隱公) 이광정(李光庭)에게 그 직을 사양(辭讓)하며 많은 이들이 본질을 숭상(崇尙)하지 않고 문장(文章)의 꾸밈에만 치중하는 폐단을 밝히는 편지를 보냈다.  공은 남의 선행(善行)을 들으면 반드시 즐겨 칭찬(稱讚)하고 효열(孝烈)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효자(孝子) 이창엽(李昌葉), 효자(孝子) 권도인(權道仁), 효자(孝子) 이정보(李廷輔) 등의 지극한 행실(行實)이 있으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지라 공이 모두 그 행록(行錄)을 지어서 세상에 드러냈다. 비록 지체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효행이나 선생이 있음을 들으면 반드시 그 집을 찾아가서 그 사적(事蹟)을 물어 확실히 알았다. 집은 본래 욕심이 없고 깨끗하여 살림이 가난하였으나 편안히 생각하였고 혹 식구가 근심하면 “가난한 것은 선비의 떳떳함이라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는 것도 또한 나의 분수에 있는 일이니 근심할 것 있는가.” 라고 하였다. 공이 족친(族親)들에게 돈목함이 지극해서 우환(憂患)이나 질고가 있으면 반드시 방문(訪問)하였고 상고가 있으면 초종장례에 보살펴 주었으며 글을 지어 그의 지행이 없어지지 않게 하였다. 유자녀(遺子女)가 있어 의지할 곳이 없으면 모두 보살펴 가르쳐서 성취(成就)하도록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나 물건을 접할 때는 반드시 화기가 감돌게 하여 간격(間隔)을 두지 않고 사람의 궁한 처지를 보면 애달피 여기고 측은히 여겼다. 스스로 호(號)를 삼여당(三餘堂)이라 한 뜻은 동우삼여(董遇三餘)의 뜻을 취한것이요, 또 오수라고도 하였으니 “내 성품(性稟)이 옹졸하여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처하는 동편에 오곡(梧谷)이 있으므로 오곡(梧谷)이라고도 호(號)를 하였다. 공(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참판(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