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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7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조선중기 父子 名筆 김희수, 김로 선생의 해서 글씨 음각 대흑구 목판본 [계주문(戒酒文)] 單冊
경매번호  137-015 시작가  3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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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중기 父子 名筆 김희수, 김로 선생의 해서 글씨 음각 대흑구 목판본 [계주문(戒酒文)] 單冊으로 퇴변색, 얼룩 등이 있으나 본문 상태 대체로 양호하다.
<크기> 21.6×32.8cm
<참고> 
① 김희수(金希壽)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로 악정(樂正) 김숙연(金叔演)의 아들이며 관찰사김자행(金自行)의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2년(1507)에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 권벌(權)· 이희증(李希曾) · 김영(金瑛) ·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청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또 왕이 덕치정치(德治政治)를 하자면 신하의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중종 4년(1509)에는 정자(正字) · 박사(博士)에 이어 지평(持平) · 검상(檢詳) 등을 지냈으며 1514년에는 장령(掌令)이 되었다. 중종 12년(1517)에는 집의(執義) 등을 지냈으며 1520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이듬해에는 좌부승지가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는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대사헌이 되고 1526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 중종 22년(1527)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해서(楷書)를 잘 썼다. 글씨로 〈계주문(戒酒文)〉 ·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 ·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 등이 있으며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② 김노(金魯) 1498년(연산군 4)∼1548년(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삼(景參). 증조부는 김자행(金自行), 조부는 김숙연(金叔演)이고, 아버지 대사헌(大司憲) 김희수(金希壽)이다. 어머니 삭녕군수(朔寧郡守) 양치(梁治)의 딸이고, 부인은 한평군(漢平君) 이성언(李誠彦)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1525년(중종 20) 을유식년문과(乙酉式年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올랐다. 어머니 상을 마친 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저작(著作)이 되었는데,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간악함[陰邪]함을 주장하여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갔다. 1537년(중종 32) 간사한 무리들이 사라지자[奸黨伏誅]되자 봉교(奉敎),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이후 강관(講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응교(應敎),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필선(弼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판관(判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장령(掌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종부시(宗簿寺)·사복시(司僕寺)·군자감(軍資監)·내섬시(內贍寺)의 정(正)을 거쳤다. 서법(書法)이 힘차 조정의 전책(典册)과 경대부(卿大夫)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다. 중종(中宗)조와 인종(仁宗)조의 국상(國喪)에 종묘(宗廟)의 신주(神主)와 원릉(園陵)의 묘지명(墓誌銘)을 모두 정서(淨書) 하여, 1547년(명종 2) 당상(堂上)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 되었으나 신병이 많아 제대로 일하지 못하였다. 천추절(千秋節)에 진하사(進賀使)의 임무를 맡고 북경(北京)에 갔고, 1년 후 병이 도져서 1549년(명종 4) 2월 51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인 이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호조좌랑(戶曹佐郞) 김홍도(金弘度)는 1546년(명종 1)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1등·진사장원으로 합격하고, 1548년(명종 3) 무신별시문과(戊申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딸은 진사(進士) 신효중(申孝仲)에게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