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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7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며 노론의 거두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민진원(閔鎭遠) 선생의 庚戌(1730)年 간찰
경매번호  137-151 시작가  12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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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며 노론의 거두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민진원(閔鎭遠. 1664-1763) 선생의 庚戌(1730)年 간찰로 퇴변색, 얼룩이 있고 배접이 되어 있으나 본문 상태는 대체로 온전하다.
<크기> 34×35 cm
<참고> 민진원(閔鎭遠),
1664(현종 5)∼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진후(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장희빈(張嬉嬪)이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었다. 1696년 세자시강원 겸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된 뒤 사서에 올랐으나 척신(戚臣)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가 이듬해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으며, 그해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 병조좌랑이 된 뒤 사헌부의 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70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서원의 남설(濫設)이 지방재정을 한층 곤궁하게 하며 당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것을 보고, 서원건립을 억제하고 그 수를 줄일 것을 상소하였다. 1705년 공조참의가 되고 장희빈사건으로 부처(付處)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이듬해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171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대사성이 되었는데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718년 예조판서가 되어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하였다. 그해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듬해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호조판서에 이어 1721년(경종 1)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을 겸하여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한 왕세제(王世弟: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여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으나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게 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서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년(영조 1)소론의 영수로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좌의정의 직에 있던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라 하여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하고 그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하여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 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여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 선산의 고려예의판서농암선생신도비(高麗禮儀判書籠巖先生神道碑), 여주의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 등을 썼고, 저서로는 《단암주의 丹巖奏議》·《연행록 燕行錄》·《단암만록 丹巖漫錄》·《민문충공주의 閔文忠公奏議》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