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경매 성료! 성원과 참여 감사합니다! 11월에 더 나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전적류
양장고서
고미술품
근현대미술품
근현대사자료
음악관련자료
기타경매
사랑나눔경매
 
 
HOME > 현장경매 > 제 137 회 > 礪山 宋日中 선생의 [봉산구로회서(蓬山九老會序)]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가 양면 장정된 陰刻 탁본서첩 單帖


[ 제 137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礪山 宋日中 선생의 [봉산구로회서(蓬山九老會序)]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가 양면 장정된 陰刻 탁본서첩 單帖
경매번호  137-323 시작가  200,000 원

한옥션경매에서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출품물건에 대한 “예약경매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예약시 예약응찰금액의 20%를 경매 1일전까지 예치하셔야 예약응찰을 하실수 있습니다.

- 입금 계좌 안내 -
[국민은행 962701-01-220478 조현제]
[농협 150103-52-008306 조현제]
[대구은행 028-07-011105-3 조현제]
예약하기



<내용> 礪山 宋日中 선생의 [봉산구로회서(蓬山九老會序)]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가 양면 장정된 陰刻 탁본서첩 單帖으로 퇴변색, 얼룩 등이 있으나 본문 상태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크기> 15×31cm

<참고>
(1) [봉산구로회서(蓬山九老會序)]
호남에 거주하고 장수한 9명이 모임을 갖고 蓬山九老會를 조직하여 회동한 것을 礪山 宋日中 선생의 글씨로 墨書한 [봉산구로회서(蓬山九老會序)]와  [손재송일중희칠서(松齋宋日中希七書)]를 장정한 契帖 단첩으로 蓬山九老會 참가자 錦城 羅四維 (汝張, 80세), 瀛州 高斗煌(晦仲 77세), 礪山 宋日中(文明, 73세), 扶寧 金重(汝威, 73세), 扶寧 金垂(舜輔, 73세), 光山 金胄萬(太初, 73세), 扶寧 金로{广+魯}(元直, 68), 軍威 吳塾(學源. 68), 聞韶 金元柱(仁甫, 66) 등 9인의 이름이 있다.
(2) 봉산구로(蓬山九老)
① 라사웅(羅四維)
② 고두황(高斗愰), 1628년(인조 6)∼1713년(숙종 39).
조선 후기 무신. 자는 회중(澮仲)이고, 호는 직곡(直谷)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증조부는 제원군(濟原君) 고사렴(高士濂)이고, 생부는 고홍선(高弘選)이며, 양부는 삼종숙 고홍건(高弘建)이다. 옥구(沃溝)에서 살고 있던 고두황의 생부 고부선(高傅選)은 삼종숙의 뒤를 잇기 위해 양자로 보낸 고두황이, 21세 때에 광산김씨(光山金氏)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매우 예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고부선은 의리로는 삼종숙 며느리이지만, 정리로는 내 며느리이므로 여자 노비 개삼의 딸 귀인(貴仁)이와 귀인이의 소생 및 옥동(沃洞)의 하자답(河字畓)을 영급할 것이니 훗날 재산을 나누어준 것에 대해서 뭐라 하거든 이 문서로 증거를 삼으라는 내용이 제주고씨(濟州高氏)의 〈분재기(分財記)〉에 실려 있다. 〈분재기〉에는 생부를 고부선이라고 하였는데, 고홍선의 자(字)가 부선인 것으로 생각된다. 고두황(高斗愰)은 알성무과(謁聖武科)에 올라 관직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선대의 공훈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노년에는 고향 벗들과 봉산구로회(蓬山九老會)를 조직하였다. 아들로는 1653년(효종 4)생으로 [무과] 1678년(숙종 4)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05위에 합격한 고수일(高守一)이 있다. 딸은 광산김씨 김주만(金胄萬)의 아들 김한(金澣)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는 조선 후기의 문신 양득중(梁得中)의 시문집 《덕촌집(德村集)》 〈청헌김공행장(聽軒金公行狀)〉에서 확인된다. 그의 딸과 김한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조카 김여웅(金汝雄)으로 뒤를 이었다는 내용이 함께 적혀 있다.
③ 송일중(宋日中), 1632년(인조 10)∼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문명(文明), 호는 송재(松齋). 김제 출신. 여성위(礪城尉) 인(寅)의 7세손이다. 1669년(현종 10)에 사마시에 합격, 1682년(숙종 8) 천거로 북부참봉(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82세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1715년에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다. 김제 벽골제(碧骨堤) 둑이 무너져 전답이 침수되자 수령·방백의 도움을 얻고 사재를 털어 이를 수리하였다. 때문에 그를 송공구(宋公渠)라 불렀다. 서예에 능하여 초서·예서·대자(大字)가 뛰어나 숙종과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찬탄을 받기도 하였다.
④ 김중(金重)
⑤ 김수(金垂)
⑥ 김주만(金胄萬), 1632년(인조 10)∼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청헌(聽軒)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의 후손으로, 고조는 김중겸(金仲謙)이고, 증조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김정(金珽)이며, 조부는 참봉(參奉) 김식남(金式南)이다. 부친 병조좌랑(兵曹佐郞) 김화준(金華俊)과 모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경수(金景壽)의 딸 울산김씨(蔚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김양기(金良器)의 딸 김씨(金氏)이다. 행동이 의젓하고 용모가 단정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3세에 부친을 여의었지만 어른처럼 행동하였으며, 모친을 봉양하는 데 성심을 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모친께 차려 낼 찬이 없자 직접 물고기를 잡아서 아침저녁으로 봉양하였고,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밤에 눈이 내리면 직접 비질을 하여 묘를 덮고 있던 눈을 털어내 사람들로부터 효성이 깊다는 칭송을 들었다. 숙부 김화백(金華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경전(經典)을 두루 탐독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다. 사후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잠(金潛)·김당(金漟)·김홍(金泓)·김한(金澣)· 김완(金浣)이다.
⑦ 김로[金{广+魯}],
⑧ 오숙(吳塾),
⑨ 김원주(金元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