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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7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名筆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선생이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선생에게 준 [杜甫 詩 墨書草書 10폭] 목판인출본 완폭
경매번호  137-351 시작가  3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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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名筆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 ~ 1596) 선생이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1540-1603) 선생에게 준 [杜甫 詩 墨書草書 10폭] 목판인출본 완폭으로 말미에 '萬曆二四年(1596)六月日濯溪爲金東岡書'의 기록이 있다. 병풍 해체품으로 변색 등 손상이 있으나 본문 상태 양호한 편이다.
<크기> 39.5×107.5cm
<참고>

ⓐ 전치원(全致遠), 1527 ~ 1596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1542년(중종 37) 이희안(李希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1)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며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노흠(盧欽)·김면(金沔)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저술하였다. 문집인 《탁계집》이 전한다. 

ⓑ 김우옹(金宇顒), 1540 ~ 16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 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