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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0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崇禎丁未(1667)年 宋時烈 識, 宋浚吉 書, 金萬基 篆으로 세운 [회덕 숭현서원 비기(懷德 崇賢書院 碑記)] 탁본첩 單帖(20面)
경매번호  140-077 시작가  1,7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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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崇禎丁未(1667)年 宋時烈 識, 宋浚吉 書, 金萬基 篆으로 세운 [회덕 숭현서원 비기(懷德 崇賢書院 碑記)] 탁본첩 單帖으로 全 10張(20面) 분량이며 보존 상태 양호한 편이다.
<크기> 37×47cm
<참고>
ⓐ 해제
회덕현(懷德縣) 숭현서원 비 - 전제(篆題)
회덕 숭현서원 비기(碑記)
애통하도다! 정덕(正德) 기묘년 북문(北門)의 화가 일어났을 때, 여러 현신(賢臣)과 장수(將帥)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을 뻔하였는데, 충암(冲庵) 김 선생(金先生)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그 당시는 원보(元輔) 정 문익공(鄭文翼公)이 옷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간쟁(諫爭)했기에 벼락을 조금은 멎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공(鄭公)이 조정을 떠나자 많은 현신들이 과연 물여우가 쏜 독에 다 맞아 죽었는데, 충암이 첫 번째로 당하였고, 가정(嘉靖) 정미년(1547년)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규암(圭庵) 송 선생(宋先生)이 또 충암 모양으로 화를 당하였다. 아! 군자들이 하늘로부터 이렇게까지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크게 신왕(伸枉)을 한다고는 하였지만 간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고 선한 자들을 표창하는 일이, 이미 죽은 자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지사(志士)들의 슬픔을 조금은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세 군자(君子)들은 모두가 송씨(宋氏) 가문에서 나온 분들이다. 삼가 살펴보면, 고(故) 정랑(正郞) 송공 순년(宋公順年)이 사위가 있었는데 그 사위가 바로 문익공이고, 정랑의 아들 진사(進士) 여익(汝翼)의 사위가 바로 충암이며, 정랑의 아들 부사(府使) 여해(汝諧)가 손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규암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가문에 모여 있고 회덕(懷德)은 또 바로 송씨가 살고 있는 고장이어서 구양수(歐陽脩)ㆍ문천상(文天祥)이 생장(生長)했던 여릉(盧陵)에 비기더라도 오히려 더 유명한 곳일 것이다.
옛날에 사우(祠宇)가 용두산(龍頭山) 기슭에 있었는데, 임진년의 병화(兵火)에 없어지고 만력 기유년(609년)에 고을 서쪽 몇 리(里) 밖에다 새 터를 잡아 창건하였는데, 역시 지형과 경관이 좋은 곳이다. 그 일을 실제로 주관하기는 향대부(鄕大夫)인 송후 남수(宋侯枏壽)가 하였다. 하지만 그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묘호(廟號)를 숭현(崇賢)으로 하사받았고, 제물(祭物)과 제례(祭禮)도 관급(官給)으로 하여 중정(中丁)으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 내가 폐인(廢人)에서 다시 기용되어 조정에 돌아오자, 내가 송문(宋門)의 외손(外孫)이라 하여 송후가 나에게, 후세에 남길 기록을 부탁하여 왔다. 그리하여 나는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분 선생의 사실(事實)과 행적(行績)은 역사에 빛나고 있어 내가 한두 마디의 말을 빌려 할 것이 없겠지만 다만 나의 마음에 슬프고 유감 되게 생각되는 바가 있었다. 중종(中宗)ㆍ명종(明宗)이 훌륭한 성군(聖君)으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 이 세 분 선생이 오히려 소인들에 의해 흔들림을 당했으니, 이는 하늘과 땅이 감싸고 있는데도 가시밭의 뱀과 도마뱀 같은 무리들이 함께 그 속에서 양육되어 다른 물건에 해를 끼치게 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세상 운세의 높낮음에 따라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란 말인가. 아! 충암ㆍ규암 두 분 선생의 참상(慘狀)도 차마 말하지 못할 일들이다. 하지만 문익공은 그러한 덕이 있고 또 연세도 높은 분이었는데, 첫 번째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화에서는 겨우 벗어났으나 두 번째 김안로(金安老)에게는 곤욕을 당하고 넘어졌다가 일어났으니 하늘이 왜 그렇게 한 것인가.
삼가 세 분 선생을 각각 형상(形像)에다 비유해 보면, 문익공은 마치 태산(泰山)의 교악(喬嶽)이 충만한 원기(元氣)를 노출하지 않고 깊이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고, 충암공은 마치 만 길이나 되는 아미산(峩眉山)에 눈이 쌓여 멀끔한 것 같으며, 규암공은 마치 세상의 상서(祥瑞)를 상징하는 봉황이 뭇 새들 속에 우뚝 서 있는 것과 같으니, 모두다 불세출(不世出)의 인물들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공자(孔子)ㆍ맹자(孟子)를 말할 때 시대로 말하면 머나먼 몇 천년 전의 인물이요, 그들이 생장한 추(鄒)와 노(魯)로 말하더라도 몇 천 리 머나먼 거리이지만 그래도 그들을 지향하는 자들은 반드시 공자ㆍ맹자라고 하고, 추 나라 노 나라를 들먹이기를 마치 한 시대 차이의 인물 또는 마치 이웃이기라도 한 것처럼 한다. 그런데 하물며 서로의 거리라야 겨우 1백 년 정도요, 발자국도 그들이 남긴 교훈도 우리가 모두 미칠 수 있는 처지에서는 어떠하겠는가. 가까이서 보고 그를 본받으려고 하면 거기에 더 몰두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어찌 그 고을 선비들의 다행스러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부사공(府使公)의 후손으로서 정랑공(正郎公)이 할아버지가 되기는 세 분 선생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추모하고 흥기되는 바가 있는데,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만난 정도의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옛날 내 나이 15세 때 외가댁 구롱(丘壟)에 성묘하고, 이어 창구강(滄丘江) 가에 가서 충암이 남긴 자국을 찾아보았었다. 그 곳의 빼어난 산과 흐르는 물 사이에서 옥색(玉色)이 보이는 듯 하였고 금성(金聲)이 들리는 듯 하였는데, 이제 벌써 어언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 분 선생의 모습과 음향(音響)이 배어있을 이곳에 대해 내 어찌 더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돈독한 행실과 깊은 학문으로 후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 나온다면 그는 틀림없이 회덕(懷德)을 시작으로 하여 나올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문익공의 이름은 광필(光弼)이요, 자는 사훈(士勳)이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문익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충암공은 이름이 정(淨)이요, 자는 원충(元冲)이고,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규암공은 이름이 인수(麟壽)요, 자는 미수(眉叟)이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었다.
천계(天啓) 5년(1625년) 장지일(長至日)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동양(東陽) 신흠(申欽)은 기록하다.

서원(書院)의 흥폐(興廢)와 삼 선생(三先生 정광필(鄭光弼)ㆍ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의 시종(始終)은 앞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뒤 숭정(崇禎) 병술년(1646, 인조24)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이 비록 고향은 아니나 여기에 그 유적이 있으므로 마침내 배향하는 의전(儀典)이 추거(追擧)되었다. 이보다 앞서, 죽창(竹窓) 이공 시직(李公時稷)과 야은(野隱) 송공 시영(宋公時榮)이 정축년(1637, 인조15) 강도(江都)의 변란에 몸을 버리고 의(義)를 성취함으로써 그 곁에 별사(別祀)하다가 금년 2월 정사일에 다시 동서(東序)ㆍ서서(西序)에 올려 배향하게 되었으니, 여론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이 여섯 분 군자의 문정(門庭)과 조예(造詣)는 비록 다른 점이 있으나 그 요점은 다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루는 것으로 사문(斯文)에 큰 공로가 있었으니, 그 자취는 다르나 한곳에 봉안(奉安)해도 해롭지 않다. 규암 선생(圭菴先生 송인수(宋麟壽))은 처음에는 추서하는 은전에서 빠졌다가 금상(今上 현종) 경자년(1660)에 이조 판서에 추증,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사계 선생은 휘 장생(長生), 자 희원(希元)이고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의 적전(適傳)으로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은 그의 문인(門人)으로 자는 성유(聖兪), 벼슬은 시정(寺正)이었다가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은 규암의 종증손(從曾孫)으로 자는 무선(茂先), 벼슬은 주부(主簿)였다가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런데 모두 그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니, 아, 고도(古道)를 표현한 덕성(德盛)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세 분 선생에 대하여는 전기(前記)에서 일컬은 말을 고칠 수 없다. 더욱이 사계 선생과 같은 분이야 누가 감히 만분의 일인들 따를 수 있겠는가. 굳이 말한다면, 상서로운 태양, 온화한 바람에 만물이 희융(煕融)함은 혹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숭정정미(1667, 현종3) 4월 일
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겸성균관제주 세자이사송시열 지

ⓑ 원문
懷德縣崇賢書院碑(篆題)
懷德崇賢書院碑記
衋矣正德己卯北門之作也衆賢將並命於一夜之間冲庵金先生其一也時則元輔鄭文翼公牽裾泣諫少霽雷霆而俄而鄭公去則衆賢果盡於蜮射而冲庵爲之首至嘉靖丁未壁書之作也圭庵宋先生被如冲 庵噫君子之不得於天至此哉 宣廟卽祚大闡伸枉之典而誅奸旌善無及於旣骨然可以少洩志士之痛之三君子咸出於宋氏之門謹稽故正郎宋公順年有壻是爲文翼正郎公之子進士汝翼有壻是爲冲庵正郎公之子府使汝諧有孫是爲圭庵萃於一家而懷德▨▨▨居之所擬之廬陵之歐陽文山尤盛矣舊有祠宇在龍頭麓燹於壬辰萬曆▨▨▨▨▨縣西數里外形勝俱焉茲役也鄕大夫宋侯柟壽實尸之縣之士子請額於▨▨▨▨▨賢之號官給爼豆享以中丁後十五年而欽起廢還 朝宋侯以欽爲宋之▨▨▨▨▨後之文欽不辭而曰三先生事與行焯於國乘非假欽一二談獨欽之慨然▨▨▨▨廟 明廟以大聖人御世而三先生猶爲宵人敲撼豈天地覆幬而荊棘虺蜴併▨▨每爲物之害哉抑世運之升降而有不容人爲者歟嗚呼冲圭兩先生之慘固有不忍說者以文翼長德而厪脫於袞貞扼於安老踣而乃起曷故焉竊以三先生侔而像之則文翼公如泰山喬嶽元氣攸葆冲庵公如峩眉萬仞雪色峥嶸圭庵公如儀鳳瑞世建標百禽其皆不世出之人非耶論孔孟之世則累千載而逖也語鄒魯之地則累千里而遙也然而嚮遡者必曰孔孟也鄒魯也稱道之若隔時比鄰者況相去纔百年而步武謦咳之所逮者乎觀法近則用力專茲非鄕薦紳士之幸歟欽府使公之裔也與三先生同祖於正郎公感慕興起不翅朝暮遇者記昔舞象之年省外家丘壠仍訪冲菴遺躅於滄丘江上玉色金聲彷彿於競秀爭流之際今四十五霜矣於三先生蠁之處詎不益愴恨也乎其有敦行邃學異日爲國需用者吾知其必始於懷文翼公名光弼字士勛官至領議政文翼其諡也冲庵公名淨字元冲官至刑曹判書諡文簡公圭菴公名麟壽字眉叟官至大司憲云天啓五年乙丑長至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東陽申欽記


書院廢興曁三先生始卒前記詳矣其後崇禎丙戌以文元公沙溪金先生雖非其鄕而遺躅在焉遂追擧腏 儀先是竹窓李公時稷野隱宋公時榮丁丑江都有之變捐軀就義卽別祀于㫄今年得二月丁巳又躋侑于東 西序從輿議也惟茲六君子門庭造詣雖有異焉者要皆以明天理正人心大有功於斯文則固不害於殊轍 而同歸也圭庵先生始闕追典 今上庚子 贈吏曹判書諡曰文忠沙溪先生諱長生字希元栗谷文成公 適傳官至叅判 贈領議政竹窓其門人也字聖俞官寺正贈都承旨野隱圭庵從曾孫也字茂先官主簿 赠左承旨俱㫌其里噫美盛德之形容古道也三先生則前記所稱殆無以易矣若沙溪先生疇敢彷佛於 萬一無巳則瑞日和風萬物凞融或庶幾焉爾
崇禎丁未四月 日
崇祿大夫議政府右賛成兼成均館祭酒 世子貳師宋時烈識
正憲大夫行 世子侍講院賛善兼成均館」祭酒宋浚吉書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 經筵叅賛官金萬基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