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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0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조선시대 科擧試驗 고시 과목인 請, 謝, 進, 賀, 辭, 乞 등의 모범 예문을 謄寫 收錄한 묵서 필사본 單冊
경매번호  140-410 시작가  25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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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시대 科擧試驗 고시 과목인 請, 謝, 進, 賀, 辭, 乞 등의 모범 예문을 謄寫 收錄한 묵서 필사본 單冊으로 조선 후기 숙종, 경종, 영조조의 문신 이광덕(李匡德), 이일제(李日蹄), 윤지태(尹志泰), 조영국(趙榮國), 조문빈(趙文彬), 김상성(金尙星), 유엄(柳儼), 이철보(李喆輔), 오수채(吳遂采), 이수항(李壽沆) 선생 등 10人의 請, 謝, 賀, 進, 乞, 辭 등이 종흔 필체로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권두 권말에 같이 공부한 사람들 명단이 있다. 퇴변색, 얼룩 등이 있으나 본문 보존 상태 양호하다. 
<크기> 20.5×30.5cm

<참고>

(1) 육체(六體)
조선시대 과거(科學)의 시(詩)·부(賦)·의(疑)·논(論)·표(表)·책(策), 또는 이중 표의 청(請)·사(謝)·진(進)·하(賀)·사(辭)·걸(乞) 등 고시과목. 
소과(小科)의 생원시는 의(疑)와 의(義)로써 사서의(四書疑)·오경의(五經義), 진사과(進士科)는 시·부로써 고시하였다.
문과에서는 초시(初試)·복시(覆試)에 의(疑)·의(義)·논·부·표·책이 선택과목으로 들어있으며, 특히 전시(殿試)에서는 책이 많이 출제되었다.

(2) 六體인 請, 謝, 進, 賀, 辭, 乞文 수록 인명부

ⓐ 이광덕(李匡德), 1690(숙종 16)∼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이경석(李景奭)의 현손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이진망(李眞望)이다. 어머니는 탕평론을 최초로 주창했던 박세채(朴世采)의 딸이다. 진사로서 1722년(경종 2)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 해 시강원설서로 임명되어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를 보도(輔導)하였다. 소론 중 완소계열(緩少系列)의 일원으로서 송인명(宋寅明)·조문명(趙文命)·정석삼(鄭錫三) 등과 함께 탕평론을 주장해, 경종연간의 노·소분쟁의 와중에서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 등 급소계열(急少系列)로부터 특히 심한 배척을 받았다. 1724년 정언·부교리를 거쳐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체직(遞職)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수찬·교리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호남에 기근이 심해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 때, 전에 조태억(趙泰億)의 아들 조지빈(趙趾彬)이 이조참의에 오르려는 것을 제어해 조태억으로부터 미움을 받던 중, 홍문관 관원의 천거 시비를 계기로 다시 조태억·조지빈과 심하게 다투다가 대사간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었다. 1728년 1월 호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 해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전라도 태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파직된 정사효(鄭思孝) 대신 전라감사로 부임해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 지방재정·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켜 크게 원성을 들었다.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해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이광덕도 연류시켜 호남어사로서 역모를 미리 알았으면서도 묵인했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했으나 무사하였다. 같은 해에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주부 건지산(乾止山) 밑의 전답을 옹주방전(翁主房田)으로 인수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에 불경스러운 말들이 있어 추고(推考: 심문을 받고 징계함)당하고 이 때부터 영조의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 중앙에 올라와 이조참의를 지내던 중 전라감사 시절의 사소한 잘못으로 파직되었고, 1731년 승지를 거쳐 다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호남어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1732년 다시 호남의 감진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1733년 강화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아 갑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대신들이 너무 심하다고 주청해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대사헌을 거쳐 1739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났을 때 아우인 지평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을 논죄하다가 국문을 받자, 이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해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에 이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 서용(敍用)하도록 명이 내려 한성부우윤·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만년에는 급소계열로 노선을 바꾸었으나 쓰이지 못한 채 죽었다. 저서로는 『관양집』이 있다.
ⓑ 이일제(李日蹄), 1683(숙종 9)∼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경(君敬), 호는 화강(華岡). 이양렬(李揚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린(李聖麟)이다. 아버지는 이언순(李彦純)이며, 어머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감찰(監察) 윤서(尹垿)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생원이 되고, 참봉(參奉)을 거쳐 1722년(경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되고, 곧바로 사정(司正)을 지냈다. 1723년에는 관무재(觀武才)에서의 시취에 수석하여 말[馬]이 하사되었다. 이듬해인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때 유생(儒生) 조명관(趙命觀)이 소를 올려, 경신환국 때 죽은 윤휴(尹鑴)에게 ‘칭현(稱賢)’하는 등 역적을 비호했다고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이 되어 신하를 부리는 도리 등에 관해 진언하였다. 1725년 삼사의 탄핵을 받고 먼 변경 지방에 유배될 위기에 처했으나 모면하였다. 1727년 정언이 되었으나 상(喪)을 당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듬해 상이 끝나자 충청도소모사(忠淸道召募使)에 제수되고, 1729년에 정언, 이듬해 장령·헌납을 거쳐 1731년까지 헌납에 재임하였다. 조문명(趙文明)을 상사(上使)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사(副使)로 하는 사은사(謝恩使)가 결성되었을 때,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다. 이 해 헌납이 되어서는 서북계의 간첩을 방어하는 일을 상소하여 의논했고,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 해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고, 이듬해인 사행에서 돌아와 복명하였다. 이 공으로 가자(加資)되고 승지에 올랐다. 1734년에는 의주부윤에 제수되었으나 장령 이광식(李光湜)의 건의에 의해 환수되고,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 해 강계부사(江界府使)로서 연강(沿江)의 형편을 두루 관람한 뒤, 방어에 대한 대책을 성대히 진술하여 관찰사 박사수(朴師洙)에게 문서로 통지하였다. 이 건의는 박사수를 통해 조정에 보고되어, 강변(江邊)의 6읍(六邑)과 각 진보(鎭堡)·영애(嶺隘: 험준한 산악이나 깍아지른 듯한 해안)·강구(江口)에 목책[柵]을 세우고 보루[壘]를 쌓는 등 구체적인 변방강화책으로 채택되었다. 1735년에 변방의 직책을 고의적으로 회피한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조정으로 들어와 승지에 임명되었다. 또 대전(代錢: 화패로 물건을 대신함.)의 시행 여부를 두고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법(錢法)에 대한 조예를 인정받아 이 논의에 참여하였다. 1736년에는 수원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승지로 들어와 인군의 덕성을 부지런히 진언을 하여 받아들여졌다. 한편 참찬관으로 경연에 참가하여 각 도(道)에 혼기를 놓친 자들을 관찰사가 돌봐 줄 것을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이 후 1738년까지 승지로 재직하였다. 1740년 회양부사로 나갔으나 진휼 과정에 하자가 있었다 하여 강원감사 정형복(鄭亨復)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러나 1743년 송인명(宋寅明)이 이일제의 치적과 이력의 탁월함을 적극 진달하고 승진할 것을 청해 특별히 가자되었다. 1744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에 임명되어 사은정사(謝恩正使) 양평군(楊平君) 이색(李穡), 서장관(書狀官) 이유신(李裕身)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동년 6월에 환국하였다. 곧 바로 중비(中批: 전형을 거치지 않고 특지로 함.)로 비변사1당상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에 이러한 조처를 수정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있기도 했다. 1745년에는 관서심리사(關西審理使)로 파견되어 영변의 절수(折受: 사사로이 땅을 떼어 자기 소유로 만듦.)를 중지할 것을 청했고, 이 해에 복명하여 관서의 민정을 진달하였다. 각 도의 심리사들을 모아 놓고 그 폐단을 진언하게 했는데, 당시 관서의 가장 큰 폐단은 전답에 일정한 부세(賦稅)가 없고, 군(軍)에는 정해진 숫자가 없으며, 재물을 절용(節用)하지 않고, 백성들은 분수(分數)를 지켜 편안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등 네 가지로 압축되었다. 한편 1745년 축성과정에서 공로가 있는 인물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위원군수(渭原郡守) 박종성(朴宗城)을 심리사로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원경하(元景夏)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1746년에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돈유하는 왕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어 평안병사로 나가서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통해 유민을 집결하는 방법을 대대적으로 진언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군사를 격려하는 방법과 관방의 보수에 관해 보고하는 등 변방의 안정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어 대사간이 되었고, 축성과 군정과 변정의 득실에 관한 자문에 응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월경자가 발생하여 전임·현임을 막론하고 평안감사와 평안병사에 대한 대대적인 추궁이 이루어져, 전 평안감사 이주진(李周鎭)·이종성(李宗城)·이기진(李箕鎭), 현 감사(監司) 조영국(趙榮國), 전 평안병사 정찬술(鄭纘述)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1748년 병조참판이 되고, 다시 충첨감사로 나갔다. 평안감사 시절 축성 과정에 민폐가 있다하여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6월 도승지에 발탁되고 한성 좌윤을 거쳐, 1752년에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이듬해 한성좌윤에 올랐다. 내외직을 두루 거치는 과정에서 특히 변방 문제에 넓은 식견을 갖추고 있어 관방 정책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화강유고(華岡遺稿)』가 전한다.
ⓒ 윤지태(尹志泰), 1700(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柒原). 자는 대첨(大瞻). 대사간 윤석보(尹碩輔)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윤은적(尹殷績)이다. 1735년(영조 11) 통덕랑(通德郞)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38년(영조 14)에는 사헌부지평이 되고,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이어 사간원의 사간·헌납(獻納)으로 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였다. 1746년에는 사간으로서 무과의 문란을 논하여 이에 대한 시정을 장계(狀啓: 계본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하였고, 무신으로 힘을 과시하던 구선행(具善行)과 의금부의 당상관들을 탄핵하였다. 그 뒤 집의(執義)가 되어 대간으로 활약하였고, 시강원보덕으로 다시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얼마 뒤 외직으로는 처음으로 남양부사로 나갔다. 남양부사로 있을 때 전염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이 상황을 암행어사 이이장(李彛章)이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책임을 물어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시강원필선으로 복직하여 세자교육에 힘썼다.
ⓓ 조영국(趙榮國), 1698(숙종 24)∼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조구석(趙龜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조태동(趙泰東)이고, 아버지는 조봉빈(趙鳳彬)이다. 어머니는 조헌주(曺憲周)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0년(영조 6) 봉사(奉事)로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을 거쳐 1736년 제주도 안핵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교리로서 북관감진어사(北關監賑御史)가 되어 평안도·함경도의 기민구제 상황을 독찰하였다. 이어 헌납·교리·부응교를 거쳐 1739년 동부승지, 1740년 공홍도관찰사, 그 뒤 병조참지·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5년 대사간·대사성을, 1746년 우승지로 정조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참판을 거쳐 1747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750년 도승지·이조참의를 역임했는데 이 해에 균역청이 설치되자 당상관이 되어 결미절목(結米節目)을 제정하는 등 조세 운영의 합리화에 공헌하였다. 그 뒤 대사헌·동지의금부사, 이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균역청당상으로서 세제 개혁에 발휘한 실력이 인정되어 1752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이 되어 도성의 개천을 준설하였다. 이듬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1755년 찬집당상으로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1756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세자시강원우빈객·예조판서, 1759년 세손사부, 1760년 수어사가 되었다. 조선 후기 정치 개혁과 문화 진흥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특히 조영국의 저술 『농사총론(農事總論)』은 천시(天時)·지리(地利)·농기(農器)·인사(人事)·수리(水利)·부종(付種)·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 종래 다른 농서와 비교된다. 그리고 조태만(趙泰萬)이 찬술한 『양주조씨세보(楊州趙氏世譜)』를 증수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 조문빈(趙文彬), 1687년(숙종 13)~
자 위명(緯明), 본관 양주(楊州), 거주지 한성, 부 知製敎 奉正大夫 조태일(趙泰一), 제 조수빈(趙壽彬), 조경빈(趙景彬), 조복빈(趙福彬), 숙종(肅宗) 37년(17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2위(92/100), 숙종(肅宗) 37년(17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5위(5/100) 
ⓕ 김상성(金尙星), 1703(숙종 29)∼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사정(士精), 호는 도계(陶溪)·손곡(損谷). 김득원(金得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홍주(金弘柱)이고, 아버지는 판서 김시환(金始煥)이며, 어머니는 유정기(兪鼎基)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13세 때 영평(永平)의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지어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1723년(경종 3)에 진사가 되고, 그해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사서(司書)가 되었으며, 이어서 1727년(영조 3)에 병조좌랑이 된 뒤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응교(應敎)를 거쳐, 1734년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고, 1736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서 승지·대사성을 거쳐 1744년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형조참판·대사헌과 병조·이조·공조의 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752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예조판서·좌빈객(左賓客)·판의금부사를 거쳐, 1755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장(疏章)을 잘 지어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유엄(柳儼),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숙(思叔), 호는 성암(省庵). 중종반정의 공신 유순정(柳順汀)의 후손이며, 유장운(柳長運)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유관(柳綰)이고, 아버지는 유정진(柳挺晉)이며, 어머니는 박태정(朴泰定)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持平)으로 등용되어 정언과 지평을 번갈아 하였다. 1728년(영조 4)에 문학(文學), 이듬해에 헌납(獻納)을 거쳐 수찬(修撰)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부교리·부응교·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31년 광주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1735년 충청도관찰사, 1739년 황해도관찰사, 1743년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예조판서를 지낸 뒤 1745년 형조판서가 되고, 그 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청양군(菁陽君)에 봉해졌다. 1729년 천추절(千秋節)을 맞이하여 왕실의 만수무강을 비는 차(箚)를 올려, 왕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 한 질을 상으로 받았다. 또, 그 해 시독관(侍讀官)으로 있으면서 외방사찰(外方寺刹)의 요승(妖僧)을 엄단하여 사찰의 정화를 단행하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혜정(惠靖)이다.
ⓗ 이철보(李喆輔), 1691(숙종 17)∼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 이만상(李萬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봉조(李鳳朝)이고,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 이정신(李正臣)이며,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유이진(柳以震)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고 이어 대교를 거쳐 1729년(영조 5) 봉교로 승진하였다. 1731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1733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과 교리(敎理)를 지냈다. 1734년 각 도에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관서어사로 발탁되어 민정을 조사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특히,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화월죄인(化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을 조사해 처리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하고, 1736년 왕명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에 암행해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와 응교를 지내고 사헌부로 옮겨 지평과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듬 해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승정원의 승지로 발탁되었고 1741년 안변부사로 나가서 북방지대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판비(辦備: 자금을 마련해 대비함)해 국방에 주력하였다. 1744년 대사간에 오르고, 1747년 다시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 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시 다녀오고 1749년 동의금부사·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1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 해『국조오례의』를 편수할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1753년 동지춘추관사를 지내고 이듬 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상소해 삭과(削科)해 줄 것을 자청하였다. 이듬 해 나주에서 일어난 괘서의 변에 주모자인 윤지(尹志)와 그 추종자들의 공사(供辭)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자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죄인의 엄중처단을 강조하였다. 1755년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연접도감당상(延接都監堂上)·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 해 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757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 같은 것임)하고 향리로 돌아오니 영조가 공로를 치하해 수어사(守禦使)에 제수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형 이길보(李吉輔)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이복원(李福源)과 손자 이시수(李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지암집』이 있다.
ⓘ 오수채(吳遂采), 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수(士受), 호는 체천(棣泉).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오도일(吳道一)이다.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이다. 음보로 주부(主簿)가 되고,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이조좌랑·수찬·검토관(檢討官)·부응교를 거쳐 1741년 승지에 이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8년 부제학, 1753년 대사성에 이어 예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이어 동지의금부사, 이듬해 대사간·대사헌·부제학·동지경연사를 지냈으며, 이후 개성유수를 거쳐 1758년 대사헌에서 관직을 떠났다. 일찍이 이돈(李燉)·엄집(嚴緝)이 증수한 『송도지(松都誌)』를 1757년에 속지(續志) 1권을 증보하여 펴냈다.
ⓙ 이수항(李壽沆), 1685(숙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숙겸(叔謙). 호는 삼신재(三愼齎). 초명은 이수익(李壽益)이다. 이심(李審)의 10세손이며, 이훤(李烜)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동일(李東一)이고, 아버지는 이제(李𪗆)이다. 1723년(경종 3)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영조 3)에 사과(司果)로서 문과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9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변방 수비를 잘 했다 하여 특별히 말 1필이 하사되고 가자(加資: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되었다. 승지·대사간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장세(場稅) 징수문제로 추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 관내 고을을 순행(巡行)하다가 그 고을의 수령이 치적이 있다고 여겨 그 공형(公兄: 三公兄의 준말로 지방의 戶長·吏房·首形吏의 세 관속을 일컫는 말)을 불러 술을 권하며 치하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체통을 잃었다 하여 논핵되기도 하였다. 군작미(軍作米)를 내어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치적에도 힘썼다. 이어 충청감사를 거쳐 1736년(영조 12)에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기유처분(己酉處分)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시호(諡號) 회복 문제가 대두되자 이를 신하들이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다가 파직되었다. 이어 진위부사(陳尉副使)·호조참판·도승지·사직 등을 거쳐 다시 1738년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죽은 아들의 아내가 가속을 뒤따라 왔으므로 3일 안에 돌아가도록 꾸짖고는 이 일로 인혐(引嫌: 자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침)하여 사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나 시정의 공폐(貢弊)·시폐(市弊) 문제가 비등한대도 이를 잘 살펴 다스리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대간으로서 풍기(風氣)가 있다 하였다. 1742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1744년에 함경감사가 되었다. 이 때 관내의 덕원(德源)과 원산(元山)에서 기로소(耆老所)의 절수(折受: 양안에 없거나 버려진 땅을 신고한 자가 경작하고, 경작자에게 세금을 부담하던 일)를 부담지우자, 변방의 특수성과 전에 없던 예라고 하여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밖에 삼수(三水)·갑산(甲山)이 재해를 입자, 전세미태(田稅米太: 전세로 내는 쌀과 콩)와 삼색노비(三色奴婢: 세 노비 가운데 한 사람만 공역을 지고 두 사람은 면제받는 조건으로 베나 무명 등을 바침)의 신공(身貢)을 연기해 주도록 의논하는 등 그 직무에 충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