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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3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아주 선명한 인출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강와 임필대(剛窩 任必大) 선생의 詩文集 [강와선생문집(剛窩先生文集)] 木板本 8卷 4冊 완질
경매번호  143-017 시작가  16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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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강와 임필대(剛窩 任必大) 선생의 詩文集 [강와선생문집(剛窩先生文集)] 木板本 8卷 4冊 완질본으로 '壬寅(1782)욕署節韓山李光靖序'가 있다. 퇴변색과 얼룩 등이 있으나 아주 선명한 인출로 본문 상태 양호하다. 
<크기> 21.2×32cm
<참고>
ⓐ 임필대(任必大), 1709~1771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징(重徵), 호는 강와(剛窩). 전적(典籍) 임세헌(任世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이원(任爾元)이고, 아버지는 임수국(任壽國)이며 어머니는 이비(李柲)의 딸 재령 이씨(載寧 李氏)이다. 부인은 김이표(金履標)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구련리 일대인 오동산(梧桐山) 아래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보여 사서 삼경(四書 三經)과 『소학(小學)』을 읽었으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리대전(性理大全)』,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등의 성리서들도 두루 익혔다고 한다. 과거 시험에 있어서는 대소향시(大小鄕試)와 성시(省試)에 합격하였으나,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 및 각종 향촌 교화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우선 그는 향촌에서의 교육을 위해 여러 장로들과 의논하여 학사(學舍)를 건립하고 오계 서당(梧溪 書堂)이라 하였다. 또한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한 문중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우선 근래에 사례(四禮)가 해이해짐을 보고, ‘사의계(四儀契)’를 결성하기도 했다. 일문의 관혼상제와 같은 각종 의례를 행하는데 있어, 물력이 적어 소홀해 짐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당시 사정에 맞추어 그림을 첨부한 예시를 작성하기도 했다. 1746년(영조 22) 의성 현령(義城 縣令) 이길보(李吉輔)가 고을의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권장하려 강장(講長) 자리를 부탁하였다. 이에 임필대는 강학을 위한 절목(節目)을 작성해 주었다. 1749년(영조 25)에는 경상도 관찰사 민백상(閔百詳)이 도내에 어진 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령을 시켜 미육지필(米肉紙筆)을 주게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는 의성 현령 이길보가 관찰사를 찾아가 그의 학덕을 논의한 끝에, 지역 사림들에게 청원서 작성을 권유하여 그를 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청원서 작성을 위한 고을 사림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를 겸손히 사양하였다. 1754년(영조 30) 동당(東堂)에 급제하였으며, 1760년 조정에서 군현의 산림(山林)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거론되었지만 부모가 돌아가신 후 간혹 장옥(場屋)에서나 부지런히 힘쓸 뿐 벼슬길에는 뜻이 없다 하였다. 1764년에는 강학하는 서사(書舍)가 작아 강당(講堂)을 별도로 건립하며 후진 양성에 더욱 주력하였다. 1771년 의성 현령 서명민(徐命敏)이 고을 선비를 모아 놓고 강학하는 자리의 훈장(訓長)을 부탁하여 『심경』을 강론하였다. 이 자리에서 사단칠정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퇴계 이황의 이론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이론이 더욱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서명민에 대해, 퇴계 학통의 입장에서 반론하기도 했다. 1773년에는 의성 현령 김이복(金履復)이 찾아와 목민(牧民)의 요점을 물으니, “시민여상(視民如傷)[백성을 보기를 자신의 상처 보듯이 하라]” 넉자로 답해 주었다 한다. 이의태(李宜泰)·권렴(權濂)·최흥원(崔興遠)·김낙행(金樂行)·이상정(李相靖)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1834년(순조 34)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간행된 8권 4책의 『강와집(剛窩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성리학 관련 논설이 많다. 특히 퇴계학파의 입장에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사단칠정론을 비판한 「우율사칠설의의(牛栗四七說疑義)」가 주목된다. 각종 의례와 일문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작성한 각종 서문 및 절목 등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구련리 오동산(梧洞山)에 있다. 오계사(梧溪祠)에 배향되었다. 오계사는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고, 현재는 예전과 같이 오계 서당[의성군 금성면 구련리]으로 복구되어 있다. 한편 고조부 임경윤(任景尹)의 재사(齋舍)인 귀은재(龜隱齋)[의성군 금성면 구련리] 앞에는 1999년 임필대를 소개하는 강와 임선생 유적비(剛窩 任先生 遺蹟碑)가 건립되었다.
ⓑ 강와선생문집(剛窩先生文集)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 剛窩 任必大(1709~1773)의 詩文集으로 그의 아들 伊輔가 小山 李光靖에게 序文을 받아 편집했는데 그 후 1816년(純祖 16)에 金?이 지은 墓碣銘과 1834년에 李宜泰가 지 은 遺事를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任必大의 字는 重徵이요 自號는 窩, 본관은 豊川이 다. 천성이 총명하여 10세시에 벌써 四子와 二經에 통하였다. 젊어서부터 늙을 대까지 학문에 종사, 四書 三經은 물론 近思錄, 朱子書節要, 性理大全, 退溪文集 등을 즐겨 숙독하였다. 일찌기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본시 거기에 뜻을 두지 않고, 學舍를 세우고 後進을 가르쳤다. 그리고 당시의 풍속이 古禮를 소흘히 한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는 이것을 病되게 생각하여 朱子의 家禮를 참고로 하여 時宜에 알맞게 圖象을 첨가하여 禮書 일편을 만들어 四儀라 이름하였다. 卷頭에 1782년(正祖 6) 李光靖이 쓴 序文이 있다. {권1}:詩塚賦 1편과 詩 60首. {권2}:與李景文象靖書 등 31편의 書簡, {권3}:與 林侯象元書 등 20편의 書簡. {권4}:雜著로 漆溪會講時辨, 牛栗四七說疑義二條, 辭受說 , 無終수說, 祭儀, 奉先契節目, 節目後志 등 14편. {권5}:四儀契序 등 13편의 序文과 不圃記 등 9편의 記文. {권6}:剛窩記 등 5편의 記文과 門契後識 등 3편의 題識, 金城 山祈雨文 등 7편의 祭文, 孫敬수哀辭 등 3편의 哀辭, 處士申公墓碣銘 등 2편의 墓碣. {권7}:伯曾祖考處士府君墓誌 등 3편의 墓誌, 高祖考處士府君行蹟草記등 5편의 行蹟. { 권8}:부록으로 1776년(英祖 52)에 李象靖이 쓴 行狀, 1834년에 李宜泰가 쓴 遺事, 181 6년에 金??이 쓴 墓碣銘, 李宜泰 등 6명이 쓴 祭文, 李象靖, 權濂 등 27명의 輓詞, 申 體仁이 쓴 梧溪社上樑文, 柳규가 쓴 奉安文, 申體仁이 쓴 常享祝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