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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3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권두에 1617년 自敍와 권말에 아들 申翊聖의 跋이 있는 신흠(申欽, 1566-1628) 선생 撰의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木板本 單冊
경매번호  143-474 시작가  4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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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권두에 萬曆歲舍丁巳(光海君9年,1617)玄翁書于昭陽의 自敍와 권말에 아들 申翊聖의 跋이 있는 조선중기 한문 사대가인 신흠(申欽. 1566-1628) 선생 撰의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木板本 單冊으로 권두에 萬曆歲舍丁巳(光海君9年,1617)玄翁書于昭陽, 권말에 不肖孤[申]翊聖(1588-1644)泣血謹書가 있다. 퇴변색 얼룩과 권두 敍및 본문 첫장 본문 부분 손상이 있다. 그외 본문 상태 양호한 편이다.
<크기> 17.5X28cm
<참고>

ⓐ 신흠(申欽).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효종2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신익성(申翊聖). 1588(선조 21)∼1644(인조 22)
조선 중기 문신. 병자호란 때의 척화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영의정 흠(欽)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방축(放逐)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하였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갔던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이 일로써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하여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는 회양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 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㼁碑), 파주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고, 저서로는 《낙전당집》·《낙전당귀전록 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 靑白堂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