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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3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豹翁 姜世晃의 跋文이 있고 南太伯이 刻을 한 엄한붕(嚴漢朋) 선생의 草書體 千字文 遺墨 [만향재서첩(晩香齋書帖)] 木版本 17張 단첩
경매번호  143-494 시작가  3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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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표옹 강세황(豹翁 姜世晃. 1712-1791) 선생의 跋文이 있고 南太伯이 刻을 한 엄한붕(嚴漢朋) 선생의 草書體 千字文 遺墨 [만향재서첩(晩香齋書帖)] 木版本 17張 단첩으로 퇴변색, 얼룩 등이 있으나 본문 대부분의 상태는 양호하다.
<크기> 15.7×25.3cm

<참고>

ⓐ 엄한붕(嚴漢朋), 1685년(숙종 11)∼1759년(영조 35).
조선 후기 문신‧서예가. 자는 도경(道卿)이고, 호는 만향재(晩香齋)이다.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서법(書法)의 하나인 쌍구확전(雙鉤廓塡: 다른 사람 글씨를 모방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선 가는 선으로 글자 윤곽을 그린 후 그 사이에 먹칠을 하고 본뜨는 법)에 능하였다. 평소 고금의 서법을 임모하여 직접 『집고첩(集古帖)』이라는 서첩을 만들었다. 당시의 묘갈(墓碣)은 대부분 공이 썼기 때문에 한호(韓濩) 이후의 일인자로 일컬어졌다. 청(淸)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본 옹정제(雍正帝)가 해서(楷書)의 필법이 정교한 데에 놀라 상으로 붉은 비단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 뒤 칙사를 통해 ‘경화문(景化門)’이라는 편액의 글씨를 부탁하여 황궁 태화전(太和殿) 동쪽에 있는 경화문에 걸었다. 그리고 그 아래 ‘조선국인엄한붕서(朝鮮國人嚴漢朋書)’라고 새겨 놓았다. 저서로는 『만향재시초(晩香齋詩鈔)』가 있다.

ⓑ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평론가.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镟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로도 불린다. 서울에서 현(鋧)의 3남6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생모는 광주이씨이다.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를 누렸으며, 할아버지 백년(柏年), 아버지 현에 이어 71세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소생인 인(魿)·완(俒)·관(饊)·빈(儐)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신(信)이 있다. 신과 그의 아들 이오(彝五), 완의 손자 진(晉)이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교육,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다. 처남 유경종(柳慶種), 친구 허필(許佖)·이수봉(李壽鳳)과는 절친했다. 이익(李瀷)·심사정(沈師正)·강희언(姜熙彦) 등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서 김홍도(金弘道)·신위(申緯)가 주목된다.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가난으로 안산(安山)에 이주하여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다. 영조의 배려로 61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사포 별제(司圃別提)·병조 참의·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72세 때 북경 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 사생 등을 남겼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직 생활과 예술 활동 등은 영·정조의 배려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51세 때 영조가 신하들에게 그를 보호하여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기로 오랫동안 절필(絶筆)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서화평, 대나무 판각화, 사군자를 한 벌로 짝 맞추어 그리는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그의 작품으로는 〈현정승집 玄亭勝集〉·〈첨재화보 忝齋畵譜〉·〈방동현재산수도 倣董玄宰山水圖〉·〈벽오청서도 碧梧淸署圖〉·〈표현연화첩 豹玄聯畵帖〉·〈표암첩 豹菴帖〉·〈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약즙산수 藥汁山水〉·〈삼청도 三淸圖〉·〈피금정도 披襟亭圖〉·〈난죽도 蘭竹圖〉·〈묵죽팔폭병풍 墨竹八幅屛風〉·〈사군자병풍 四君子屛風〉·〈임왕서첩 臨王書帖〉·〈동기창임전인명적발 董其昌臨前人名迹跋〉·〈제의병 祭儀屛〉 외 다수가 전한다. 특히 54세 때 쓴 자서전인 ≪표옹자지 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여 폭의 초상화를 남긴 사실이 독특하다.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고,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197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를 영인,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