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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43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李健命의 손자로 信川郡守, 修撰, 禮曹參議, 대사간, 承旨 등을 지낸 이복상(李復祥, 1712~?) 선생의 甲子(甲子)年 간찰
경매번호  143-501 시작가  20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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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老論四大臣 중의 한사람인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손자로 信川郡守, 修撰, 禮曹參議, 대사간, 承旨 등을 지낸 이복상(李復祥, 1712~?) 선생의 甲子(甲子)年 간찰로 약간의 얼룩이 있으나 본문 등 상태 양호하다.
<크기> 41×34.5cm

<참고>
ⓐ 이복상(李復祥), 1712~?
본관 전주(全州), 자는 여시(汝始), 호는 입지당(立志堂), 거주지 한성, 父 이면지(李勉之), 祖父 이건명(李健命), 曾祖父 이민서(李敏叙), 영조(英祖) 17년(174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위(32/100), 영조(英祖) 42년(1766) 병술(丙戌) 정시2(庭試2) 을과(乙科) 1[亞元]위(2/6)
ⓑ 영조실록에서 이복상(李復祥) 관련 자료 12건
1.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1월 16일 정미 3번째기사 /

정언 이게가 상소하여 박문수·정익하·이복상을 탄핵하다식자들이 한심해 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복상(李復祥)은 바로 고 상신 이건명(李健命)의 손자로서, 일찍이 성균관에서 양 대신 (大臣)의 시체에 참형을 가하라는 상소에 참여하였던 자와 같이 식당에 들어간 일로 인하여 사람의 놀라움과 분노가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또 전에 문화 현령(文化懸鈴)에 있을 당시 시체에 참형을 가하라는...
2.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1월 22일 계축 1번째기사 /

예조 판서 조관빈이 상소하여 이복상의 논박을 보고 자신의 출처를 자책하며 사직을 청하다예조 판서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기를, "간관이 상소로 이복상(李復祥)의 일을 논박한 것은 극히 엄정하고 날카로왔습니다. 신 역시 화를 입은 집안의 사람으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자입니다만, 상소의 내용을 잠깐 보고도 문득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지며, 종전의 출처가 크게 공의(公義)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어찌 차마 잘못을 알고...
3.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5월 22일 경인 1번째기사 /

도당록을 행하여 6점 이상을 뽑다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6점(點) 이상을 뽑았는데, 무릇 26인이었다. 관록(館錄) 가운데 윤일복(尹一復)을 뽑아내고 관록 외에 이진복(李鎭復)·이복상(李復祥)을 추록(追錄)하였다.
4.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5월 22일 경인 2번째기사 /

정후겸·이복상·이득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정후겸(鄭厚謙)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복상(李復祥)·이득일(李得一)을 수찬(修撰)으로, 홍용한(洪龍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는데, 즉시 사은(謝恩)하지 아니한 때문에 아울러 문겸 선전관(文兼宣傳官)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또 윤양후(尹養厚)·정상인(鄭象仁)을 부교리로, 이헌경(李獻慶)·김노순(金魯淳)을 수찬으로, 윤사국(尹師國)을 부수찬으로 삼 았으니, 모두...
5.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7월 8일 병자 2번째기사 /

이복상을 발탁하여 예조 참의로 삼다특별히 이복상(李復祥)을 발탁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삼았다.
6.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7월 9일 정축 2번째기사 /

효자·충신을 지나치게 많이 추천한 해당 도신을 추고하게 하다내국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이 지금 승지가 되었는가?" 하니, 도제조(都提調)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조영순이 지금은 변화하여 두루 통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인물(人物)을 만들어 이룬 것[陶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숙부(叔父) 조관빈(趙觀彬)은 변화하기가 어려웠으나, 글은 잘하였다. 이복상(李復祥)의 승자(陞資)를...
7.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8월 1일 무술 3번째기사 /

윤득양·이유수·윤학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윤득양(尹得養)·이유수(李惟秀)·윤학동(尹學東)·이수득(李秀得)·엄인(嚴璘)·이복상(李復祥)을 승지(承旨)로 제수하였다.
8.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9월 14일 신사 5번째기사 /

김종정·이복상·이진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종정(金鍾正)을 대사헌으로, 이복상(李復祥)을 대사간으로, 이진규(李晉圭)를 집의로, 이행원(李行源)을 사간으로, 이장로(李長老)를 지평으로, 유운우(柳雲羽)를 정언으로, 원경렴(元景濂)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9. 영조실록 107권, 영조 42년 10월 6일 임인 2번째기사 /

홍중효·송형중·김상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홍중효(洪重孝)를 대사헌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대사간으로, 김상집(金尙集)을 부수찬으로, 남태제(南泰齊)를 공조 판서로, 윤득양(尹得養)을 호조 참판으로, 박성원(朴聖源)을 병조 참판으로, 조덕성(趙德成)·이복상(李復祥)을 승지로 삼았다.
10.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 10월 23일 계미 2번째기사 /

지평 신익빈이 정이환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불윤하다없는 예입니다. 혹시나 설독(褻瀆)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복상(李復祥)은 실로 서읍(西邑)에 나아가지 않아야 할 의리가 없었으니, 이게 어찌 막중한 자리에서 아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제학(提學)의 임무는 청현직(淸顯職)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두 제 학이 부름에 나오지 않은 것이 오만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11. 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 8월 29일 정유 6번째기사 /

김종선을 정언으로, 이상복을 대사간으로 삼다김종선(金鍾善)을 정언으로, 이복상(李復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2. 영조실록 122권, 영조 50년 5월 27일 기묘 3번째기사 /

이복상을 승지로 삼다이복상(李復祥)을 승지로 삼았다.
ⓒ 이건명 (李健命), 1663(현종 4)∼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說書)에 임명되고 수찬(修撰)·교리·이조정랑·응교(應敎)·사간을 역임하였다. 169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대사간·이조참의·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肅宗喪)에 총호사(總護使)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 2)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뱀섬[蛇島]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痿症 :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減疋論: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私用으로 쓰는 田結雜役價를 전용해 감필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자는 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다. 송시열(宋時烈)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했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