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번호 51-531]
<제목> 조선중기 명재상인 陽坡公 정태화(鄭太和) 선생 중심으로 祖父 水竹公 이하 東萊世家 27人의 간찰첩 <선세필적(先世筆蹟)>

<내용> 조선중기 20여년간 5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한 명재상인 陽坡公 정태화(鄭太和) 선생 중심으로 祖父 水竹公 이하 東萊世家 27人의 간찰첩 <先世筆蹟>으로 東萊鄭氏 18世 부터 27世까지 첩장 수록되어 있으며 상태 양호하다.
<크기> 27.5×35.5cm
<참고> 수록 인사 상세 이력
  1. 18세 水竹公
    정창연(鄭昌衍), 1552년(명종 7)∼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좌의정 유길(惟吉)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
  2. 19세 濟谷公
    정광성(鄭廣成), 1576년(선조 9)∼1654년(효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좌의정 창연(昌衍)의 아들이며, 참판 광경(廣敬)의 형이고, 영의정 태화(太和)의 아버지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605년 이후 정자·수찬·교리·지평 등 초년에 주로 삼사의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비삭호문제(大妃削號問題)와 아울러 재차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부친 창연의 정청불참문제(庭請不參問題)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계속 등용되어 형조참의·우승지·남양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다음, 병자호란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물러가 있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오른 뒤 부호군을 거쳐 지돈령부사가 되어 죽었다.
  3. 20세 陽坡公
    정태화(鄭太和), 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20여년간 5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명재상.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35년 북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원수부(元帥府)를 창설했을 때 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원수가 도망갔을 때 패잔병을 수습하여 항전함으로써 공을 세워 집의(執義)가 되었다. 1637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陪從)하였다. 1638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관(査官)의 영접을 맡았다. 1644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접반사(接伴使)를 겸하였다. 1645년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 적통(嫡統)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8년 좌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51년 다시 영의정이 되어 1657년까지 재직하고 병으로 사직하였다. 1659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이 해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62년 진하겸진주사(進賀兼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인품이 원만하여 20여년간 5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며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1673년 다섯 번째의 영의정을 물러난 지 6개월만에 죽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작품으로 ≪진본 청구영언≫에 “술을 醉케 먹고 두렷이 안자시니 / 億萬 시름이 가노라 下直다 / 아야 盞 득 부어라 시 餞送리라”의 시조 1편이 전한다. 저서로 ≪양파유고 陽坡遺稿≫가 있다. 시호는 익헌(翼憲)에서 충익(忠翼)으로 개시(改諡)하였다.
  4. 20세 棋洲公
    정치화(鄭致和), 1609년(광해군 1)∼1677년(숙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본관은 동래(東萊).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정지화(鄭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하여, 형 정태화의 막내아들 정재륜(鄭載崙)을 입양하였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을 거치다가, 1635년부터 1642년까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 충청도암행어사로, 이듬해에는 함경도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고,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세자가 서양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때 패초(牌招)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반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1647년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하였다가,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고, 뒤이어 경기도관찰사·도승지·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하였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22세 都正公
    정묵선(鄭勗先), 1658 ~ ?
    자 면보(勉甫), 본관은 동래(東萊). 부는 행강화부경력(行江華府經歷)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재대(鄭載岱), 형 정덕선(鄭德先), 제 정각선(鄭覺先) 정혁선(鄭赫先), 서제 정적(鄭適) 정속(鄭速),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9위
  6. 22세 羅州公
    정각선(鄭覺先), 1660 ~ ?
    자 도보(道甫), 본관은 동래(東萊). 부 행강화부경력(行江華府經歷)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재대(鄭載岱),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6위, 나주진병마첨절제사(羅州鎭兵馬僉節制使)
  7. 22세 淸州公 - 羅州公弟氏
    정혁선(鄭赫先), 1666 ~ ?
    자 현보(顯甫), 본관은 동래(東萊). 부 전성주목사(前星州牧使)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재대(鄭載岱), 형 정덕선(鄭德先) 정욱선(鄭勖先,1658~ ) 정각선(鄭覺先, 1660), 서제 정적선(鄭適先),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 성주목사
  8. 23세 參奉公 - 羅州公從子派 順安宅 聖謨七代祖
    정석행(鄭錫行), 1702 ~ ?
    자 효원(孝源), 본관은 동래(東萊). 부 전행선공감부정(前行繕工監副正)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욱선(鄭勖先, 1658~ , 羅州鎭兵馬僉節制使), 형 정석명(鄭錫命) 정석경(鄭錫慶),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19위
  9. 23세 貞簡公
    정석오(鄭錫五), 1691년(숙종 17)∼1748년(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호(攸好). 좌의정 치화(致和)의 증손으로, 혁선(赫先)의 아들이며, 효선(孝先)에게 입양되었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수찬·교리·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지평으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 등과 더불어 소론계열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탄핵, 신임사화를 주도하였으나 1725년 영조 즉위로 노론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삭출당하였다. 2년 후 정미환국으로 세자시강원사서로 다시 기용된 뒤, 응교·승지·동지의금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736년(영조 12)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의 부사로서 정사 함평군(咸平君) 홍(泓)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우의정에 특진, 곧 좌의정에 승진되고, 1748년 영돈령부사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가 되어 효현황후(孝賢皇后)시호 올린 것을 진하하고 연공(年貢)을 진헌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가던 중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0. 24세 修井公
    정경순(鄭景淳), 1721년(경종 1)∼1795년(정조 1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정(修井).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증손이다. 형은 정원순(鄭元淳), 동생은 정지순(鄭持淳)이다. 정경순(鄭景淳)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사장에 능하였다. 1744년(영조 20) 진사시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대과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여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1763년(영조 39)에 교하군수, 1764년에 장성부사, 1765년에 광주목사, 1778년(정조 2)에 양주목사와 충주목사를 지냈다.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가흥창(충청도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의 관리와 백성들의 진휼에 공이 있어 선정비가 건립되었다. 목민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779년 홍주목사 재임 시에는 새서(璽書: 옥새를 찍은 조서)와 표리(表裏: 상으로 하사받는 옷감)를 하사받았다. 1787년(정조 11) 한성우윤을 거쳐 1791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795년(정조 19) 별세했다. 시문집으로 『수정유고(修井遺稿)』가 전한다. 1778년(정조 2) 무휼선인선정비(撫恤船人善政碑)가 건립되었다. 현재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 삼거리 노변공원에 있다.
  11. 24세 守禦使公
    정상순(鄭尙淳), 1723년(경종 3)∼1786년(정조 10).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돈부(敦夫)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증조는 정재대(鄭載岱)이고, 조부는 정욱선(鄭勗先)이다. 부친 정석행(鄭錫行)과 모친 이징해(李徵海)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3년(영조 29)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55년(영조 31) 홍문관 재직 시절 흉년을 겪은 백성 구제 방침을 세울 것을 청하였고, 1756년(영조 32) 경기어사 재임 시절 그곳을 감찰하고 대동 상납·수어청 아병(牙兵)의 폐해 등을 알렸다. 1776년(영조 52) 이후 제조(提調)·예조판서·정헌대부·악기도감제조(樂器都監提調) 등을 지냈으며, 1777년(정조 1) 청나라 황태후가 죽자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781년(정조 5)부터 예조판서·좌참찬·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예조판서 재임 시절 포제(酺祭) 격식을 통일하는 데 힘썼다. 그 후 이조판서·공조판서·판윤 등을 지냈다.
  12. 24세 順興公
    정지순(鄭持淳), 1723 ~ ?
    본관은 동래(東萊).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증손이다. 부친은 성균생원(成均生員) 정석경(鄭錫慶)이다. 영조(英祖) 26년(175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2위
  13. 24세 安東公
    정순검(鄭純儉), 1710년(숙종 36)∼1767년(영조 43).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성종(聖從)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증조는 정재한(鄭載漢)이고, 조부는 정복선(鄭復先)이다. 부친 정석원(鄭錫遠)과 모친 김종연(金宗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1738년(영조 14) 설서(說書)에 제수되었으며, 1748년(영조 24) 부교리 재직 시절 어면만호(魚面萬戶)로 좌천되기도 하였고, 1755년(영조 31) 장령(掌令), 1756년(영조 32) 사간(司諫)·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761년(영조 37)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14. 25세 贈吏議公
    정동우(鄭東愚)
  15. 25세 院正公
    정동유(鄭東愈), 1744년(영조 20)∼1808년(순조 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현동(玄同). 부 정원순(鄭元淳), 이광려(李匡呂)의 문인으로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陽明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직은 장악원정까지 지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언어학 분야에서 한글을 분석하여 우리 문자의 우수성을 입증하였는바, 1801년(순조 1)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5명의 이국인들의 언어와 문자를 한글과 한문으로 표기하여 그들과 통역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주영편(晝永編)》 4권 2책을 저술하여 1806년에 간행하였다. 그의 학문은 제자 유희(柳僖)에게 계승되어 국문학상 큰 업적을 남겼다. 실학자였던 그는 일찍이 박지원(朴趾源)·김만중(金萬重)에 의하여 제창된 지동설을 지지하여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밖에도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지리 등에 대하여 그의 독특한 실학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동실유고》와 《주영편》이 있다.
  16. 25세 學生公
    정동규(鄭東圭)
  17. 25세 白川公
    정동기(鄭東驥), 1750 ~ ?
    본관은 동래(東萊). 부 제주목사(濟州牧使) 정경순(鄭景淳), 영조(英祖) 49년(177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64위
  18. 25세 副學公
    정동관(鄭東觀) 1762~1809(정조 7)
    자(字)는 문첨(文詹), 본관은 동래(東萊). 정노순(鄭魯淳)의 아들로 1783년(정조 7)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 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역임했다.
  19. 25세 順安公
    정동진(鄭東進) 1765 ~ ?
    자(字)는 대겸(大謙), 본관은 동래(東萊). 판서(判書) 정상순(鄭尙淳) 의 아들로 생부는 정노순(鄭魯淳), 도정공(都正公) 정욱선(鄭勗先)의 증손이다. 順安縣令을 지냈다.
  20. 26세 정문용(鄭文容), 1764 ~ ?
    자(字)는 경지(絅之), 본관은 동래(東萊). 홍주목사(洪州牧使) 홍주진병마첨절제사(洪州鎭兵馬僉節制使) 정동유(鄭東愈)의 아들로 생부는 정동우(鄭東愚),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3위
  21. 26세 陜川公
    정시용(鄭是容) 1765 ~ ?
    자(字)는 중유(仲有), 본관은 동래(東萊). 홍주목사(洪州牧使) 홍주진병마첨절제사(洪州鎭兵馬僉節制使) 정동유(鄭東愈)의 아들로 순조(純祖) 7년(18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8위
  22. 26세 贈吏議公
    정기용(鄭耆容)
    정동유의 당질이며 문집으로 蓼庵遺稿가 있다.
  23. 25세 居昌公
    정석휘(鄭錫徽), 1694~ ?
    자(字)는 미경(美卿), 본관은 동래(東萊). 나주진병마첨절제사(羅州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羅州公 정각선(鄭覺先)의 제三子, 영조(英祖) 9년(173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4위
  24. 25세 黃州公
    정석교(鄭錫敎), 1698~ ?
    자(字)는 문경(文卿), 본관은 동래(東萊). 나주진병마첨절제사(羅州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羅州公 정각선(鄭覺先)의 제四子, 영조(英祖) 11년(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2등(二等) 16위
  25. 26세 判書公
    정대용(鄭大容), 1749년(영조 25)∼1805년(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도이(道以). 동윤(東尹)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입사하여 형조정랑으로 재직중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직각이 되었다. 1787년 영남좌도어사로 다녀와 진제(賑濟)를 게을리하거나 군정(軍政)·무염(貿塩)의 비위가 있는 양산군수 이진응(李進膺), 밀양부사 심진(沈鉁), 비안현감 남인구(南麟耉), 청도군수 정창기(鄭昌期), 칠곡부사 송익휴(宋益休), 군위현감 임희유(任希遊) 등의 파직을 진언하였다. 이듬해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어 기민진제(飢民賑濟)를 위하여 남관곡(南關穀) 2만석을 속히 옮겨줄 것과, 기민구휼(飢民救恤)에 공이 많은 명천부사 정우붕(鄭宇朋), 북청부사 유지양(柳知養) 등에게 포상할 것을 진언하였다. 1789년 감진어사(監賑御史)가 되어 진곡(賑穀)을 늘려줄 것을 상소하였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1791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환곡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3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규장각직제학이 되어 약원부제조(藥院副提調)를 겸하였다. 1799년에는 예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01년(순조 1) 고부 겸 청시청승습부사(告訃兼請諡請承襲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수원부유수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1804년 검교직제학(檢校直提學)에 이어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임소에서 죽었다.
  26. 27세 吏參公
    정기일(鄭基一), 1787년(정조 11)∼1842년(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시(大始), 호는 죽하(竹下). 첨정 문용(文容)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서부령(西部令)재직중 1826년(순조 26)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828년 이조참의가 되었고, 이어서 예방승지가 되어 익종의 대리청정을 보필하였다. 1835년(헌종 1) 대사간, 이듬해 이조참판을 거쳐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학교를 정비, 유학을 진흥시키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1837년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어 내자시제조를 겸하였다. 1842년에는 다시 대사헌으로 비변사당상이 되었다.
  27. 監牧官 - 察訪公一子牧使公派元謨之從祖